질주하는 숫자와 데이터…료지 이케다, 제주서 세계 최초 신작 공개
"24일 하우스오브레퓨즈 개막…국내 개인전 사상 최다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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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기자 작성일2026-09-23 05:11본문

이신은기자= 들어서자마자 숫자와 코드가 머리 위로 쏟아진다.
수십 미터 길이의 LED 천장을 질주하는 데이터는 양쪽 거울에 부딪혀 끝없이 증식한다. 이 공간에 들어선 관객의 몸도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넷으로 복제된다. 어디까지가 실제 공간이고 어디부터가 반사인지 경계가 사라진다.
수백만 자리 숫자가 거대한 LED 벽을 뒤덮고, 인간의 유전체 데이터는 25m 길이의 빛의 터널이 된다.
빠르게 움직이는 레이저 한 점은 허공에 입체를 만들어낸다. 분명 눈앞에 존재하지만 전부 볼 수도,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다.
미디어 아티스트 료지 이케다(Ryoji Ikeda)가 숫자와 데이터, 코드로 인간이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세계의 경계를 밀어붙인다.
22일 제주 애월 하우스오브레퓨즈에서 한국 기자들에게 미리 공개된 개인전 ‘료지 이케다(Ryoji Ikeda)’는 숫자와 코드, 데이터를 빛과 소리, 공간으로 바꿔 인간의 감각을 압도한다.
국내에서 열린 이케다 개인전 가운데 가장 많은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다. 세계 최초 공개 신작도 내놨다. 약 1000㎡ 규모의 전시장 구성부터 작품 배치, 관람 동선까지 이케다가 직접 설계했다.
작품은 말이 많지만 작가는 말을 아꼈다. 이날 저녁 이케다는 하우스오브레퓨즈 2층에서 직접 라이브 퍼포먼스를 펼쳤다.
검은 옷에 검은 모자와 색안경을 쓴 이케다는 10대의 턴테이블 앞에 서서 소리에만 집중했다. 낮게 둥둥거리는 기계음이 공간을 울렸다.
동굴 속에서 음파가 벽을 치고 되돌아오는 듯했다. 짧게 분절된 소리는 반복되다가 어긋나고 다시 겹쳤다. 창밖의 초록 풍경과 실내의 기계음이 낯설게 공존했다.
이케다는 이날 기자들과 별도의 인터뷰는 진행하지 않았다. 평소 인터뷰를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는 게 스튜디오 측 설명이다.
이케다는 이번 퍼포먼스에 대한 뉴시스의 서면 질문에 “10대의 턴테이블에서 서로 다른 주기로 반복되는 사운드 루프들이 우연히 겹치며 끊임없이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라며 “반복과 우연, 미세한 시간차를 통해 정교하면서도 명상적인 사운드 공간을 만드는 퍼포먼스”라고 설명했다.
1990년대 일본의 멀티미디어 아트 그룹 ‘덤타입(Dumb Type)’에 참여했으며 런던 바비칸센터, 파리 퐁피두센터 등 세계 주요 미술기관에서 작품을 선보였다.
수백만 자리의 숫자가 거대한 LED 화면을 가득 채운다. 바닥의 거울은 숫자를 다시 반사한다.
‘irreducible’은 더 이상 줄이거나 환원할 수 없다는 의미다.
작품의 핵심은 거대한 숫자 자체가 아니다. 수백만 자리의 숫자는 정확하게 존재하고 컴퓨터에 저장할 수도 있다.
100만 자리가 넘는 하나의 수를 35㎜ 영화 필름에 인쇄해 라이트박스 안에 설치했다. 영화 필름이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면 숫자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전부 읽을 수 있느냐가 아니다. 그 수가 정말 ‘기약적’인지 인간이 끝까지 판단할 수 있는가. 거대한 숫자를 눈앞에 내놓고 인간이 무엇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전시의 시작에서 관객을 압도했던 ‘the critical paths’에는 에스토니아 타르투대학교 유전체학연구소와 협업한 10만명의 유전체 데이터가 사용됐다.
보이지 않던 정보가 빛을 얻고 물질이 되고 공간이 되는 현장이다.
점의 움직임이 빨라지자 선이 된다. 더 빨라지면 허공에 떠 있는 3차원의 형태처럼 보인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움직이는 빛의 점이다. 그러나 인간의 눈과 뇌는 이를 하나의 연속된 형태로 인식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과 우리가 본다고 믿는 것이 반드시 같지는 않다.
125만 자리 이상의 숫자를 알루미늄 위에 펼쳐놓은 ‘sleeping beauty (the unknowable irreducible)’도 같은 질문을 이어간다.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과연 같은가.
이케다는 데이터를 보여주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정확하다고 믿는 숫자와 코드 앞에 인간을 세운다.
그래서 이 전시에서 데이터는 정답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숫자와 코드가 질주하고 빛과 소리가 감각을 흔든다.
제주 애월 숲속에서 20여 년간 방치됐던 콘크리트 건물을 되살린 약 1800평 규모의 복합문화공간이다.
임대범 최고커뮤니케이션책임자(CCO)는 “제주에서 이런 공간을 만들기 위해 여러 곳을 찾아다니다 숲속에 20년 동안 버려져 있던 건물을 발견했다”며 “공간이 가진 아우라가 좋아 선택했다”고 말했다.
개관 전시에서는 픽사 출신 애니메이션 감독 에릭 오의 작품세계를 조명했다. 한국 애니메이션 최초로 미국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오페라’를 비롯한 작품을 선보이며 입소문을 탔다.
이름 그대로 ‘하우스오브레퓨즈(House of Refuge)’는 ‘피난처’를 뜻한다. 임 CCO는 “제주에서 갈 데가 없어 마치 난민처럼 떠돌게 되면 여기로 오라는 의미도 있다”며 “우리가 하나의 쉼터가 돼주겠다는 위트를 담은 이름”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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