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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 품은 기와집에 만화·그래피티·스케이트보드…호암미술관이 뒤집어졌다.
"44년 호암의 파격 변신…'2026아트스펙트럼'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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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기자 작성일2026-09-22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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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은기자=      호암미술관이 뒤집어졌다.


고미술의 집에 만화가 붙었다. 전통적인 외관의 미술관 벽을 거대한 흑백 이미지가 뒤덮었다. 안으로 들어서면 그래피티와 알록달록한 티셔츠, 모자, 책과 장난감이 관람객을 맞는다.

스케이트보더는 도쿄의 거대한 지하 공간을 질주한다. 무너질 듯한 집은 천장에 매달렸고, 잘려나간 100년 넘은 나무의 나이테는 그림이 됐다.

밖으로 나오면 초록 정원 위에 지름 8m의 거대한 하얀 달까지 떴다.


고미술의 권위가 발랄하게 흔들린다.

삼성 창업주 호암 이병철 회장이 30여 년간 수집한 한국미술품을 바탕으로 1982년 문을 연 호암미술관이다. 


한국 고미술을 품고 출발한 이곳은 전통정원 희원과 함께 ‘전통’의 이미지가 강한 미술관이다. 최근에는 김환기와 겸재 정선의 대규모 전시로 화제를 모았다. 


그런 호암이 이번에는 젊은 동시대 미술에 안팎을 내줬다.

이병철 회장이 지금 이 풍경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놀라면서도 어쩌면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떠올릴지 모른다. 


옛것을 지키는 데 머물지 않고 그것을 딛고 새것을 받아들이는 것. 44년 된 호암미술관이 시대 변화에 응답하고 있다. 


21일 찾은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 건물에 다가서자 변화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일본 작가 요코야마 유이치의 ‘PLAZA’(2019)가 전통적인 미술관 외벽을 감싸고 있다. 작가의 대표적인 네오 망가 『플라자』에서 발췌한 페이지를 확대해 타폴린에 프린트했다.

브라질 축제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벌어지는 스펙터클과 이를 바라보는 관객의 환호가 이어진다. 


인과관계에 따른 이야기보다 시간과 움직임, 리듬에 집중한다. 모든 패널에는 의성어도 들어간다.

단정한 전통 건축의 외벽이 거대한 만화책의 한 페이지로 변했다.

안으로 들어가면 변신은 더 노골적이다.

로비 입구부터 그림이 길을 막아선다. dpgp78(민성식·김지환)의 대형 벽화 ‘달빛 알러지’(2026)다. 


검은 고양이가 공중에 떠 있는 의자를 바라본다. 사슬과 교통콘, 벽과 의자가 굵은 선과 목탄으로 벽면을 뒤덮었다.

얌전히 벽에 걸린 그림이 아니다. 작품 자체가 입구를 가로막고 관람객의 동선에 끼어든다.

호암미술관을 처음 찾았다는 김지환 작가는 “입구를 막는 이런 작업을 해 쾌감을 느낀다”고 했다.

전통과 질서의 공간을 일부러 어긋나게 만드는 이번 전시의 태도가 이 한마디에 압축돼 있다.


로비 안쪽에서는 서브컬처의 언어와 역사를 참조해 온 사이드 코어의 4채널 영상이 이어진다. 


도쿄의 거대한 지하 도시를 스케이트보더가 빠르게 유영한다. 움직임과 소리가 관람객을 지하세계로 끌고 들어간다.

한쪽에서는 신도시와 대만의 웨이팅룸이 협업한 프로젝트 ‘교우’가 미술관의 표정을 또 바꿨다. 


대만 그래피티 아티스트 노이(NOE)가 벽에 그림을 그리고, 아트숍 형태의 공간을 만들어 티셔츠와 모자 등 서브컬처 굿즈를 판매한다. 


이 파격적인 풍경은 호암미술관에서 열리는 ‘2026 아트스펙트럼-방이있고모든라디오가각기다른주파수를향하고있다’다.

호암미술관에서 아트스펙트럼을 여는 것은 처음이다. 파리 팔레 드 도쿄와 공동 기획했다. 


시각예술·건축·영화·디자인·음악 등 다양한 분야의 아시아 창작자 23명(팀)이 작품 63점을 펼쳐놓았다.

제목 그대로 하나의 방에서 여러 라디오가 각기 다른 주파수를 향하고 있는 상태를 상상했다. ‘아시아’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지 않는다.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 사회적 배경에서 출발한 목소리들이 충돌하고 교차하고 때로는 스며든다.

미술관 자체도 전시의 재료가 됐다. 전체 63점 가운데 26점이 호암미술관의 공간적 특성을 반영해 새로 제작된 커미션 작품이다. 전시는 전시장뿐 아니라 주차장과 희원, 카페 주변, 건물 외벽으로 번져나간다. 


로비 안쪽에서는 사이드 코어의 4채널 영상이 기다린다.

도쿄의 거대한 지하 도시를 스케이트보더가 빠른 속도로 유영한다. 어둡고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와 젖은 바닥, 그 사이를 움직이는 몸이 묘한 긴장감을 만든다. 관람객을 호암의 고요한 지상에서 낯선 지하세계로 끌어내리는 작품이다.

발랄하고 거침없는 외피와 달리 전시장 깊숙이 들어갈수록 질문은 묵직해진다.


중국 작가 루오판 첸의 ‘숨 막히는’(2026)은 커다란 집 한 채를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기울여 매달았다.

출발점은 우한의 가구 공장이었다. 작가는 목수와 노동자의 작업 환경을 접하면서 집을 짓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먼지를 들이마시는 노동자와 그로 인한 질병에 주목했다.

기울어진 집 아래에는 미세한 먼지가 소복하게 쌓였다.

우리는 완성된 집을 보지만 작가는 그 집을 만든 사람의 폐를 들여다본다. 완성된 작품 뒤에 감춰진 생산과 노동, 보이지 않는 위험을 미술관 안으로 끌어들인 작업이다.

베트남 작가 레나 부이는 개발이 잘라낸 도시의 시간을 기록했다. 프랑스 식민시대 사이공에 심어져 100년 넘게 도시 풍경의 일부였던 서아프리카산 나무 카야 세네갈렌시스가 도시 개발로 대규모 벌목되자 한 달 동안 매일 현장을 찾았다. 잘려나간 그루터기를 하나씩 탁본했다. 


전시는 ‘몸’의 경계도 흔든다.

박웅규의 ‘새 몸’(2026)에서는 내장과 털, 절지동물의 다리가 하나의 육체 안에서 뒤엉킨다. 인간과 비인간, 암수의 경계가 사라진 기괴한 몸이다. 


사람이 죽어 부패하고 먼지가 되어가는 과정을 아홉 단계로 그린 불교 회화 ‘구상도(九相圖)’를 동시대의 몸으로 뒤집었다.

양옆 병풍에는 머리카락으로 이뤄진 괴생명체와 민달팽이가 등장한다. 전통적으로 의례와 축원을 담아온 족자와 병풍의 형식에 불편하고 낯선 몸이 들어앉았다. 


이동현은 몸을 아예 미술관까지 확장한다. ‘잠자는 어미 원숭이’와 ‘매달린 아기 원숭이’(2026)는 배관과 알루미늄 주름관, 천, 빛, 연기, 소리를 연결한다. 작품의 몸은 바닥을 지나 천장의 공조 공간까지 뻗는다. 


사람의 몸과 기계, 건축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미술관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사회적 신체’가 된다.

김지수는 몸과 기계의 관계를 또 다른 방식으로 확장한다. 밤의 호암미술관 정원 ‘희원’으로 들어갔다. 해가 지면 빛 하나 없이 어두워지는 정원을 자신의 몸에 기계를 연결한 채 걷는다. 


드론의 움직임을 통제하고 실시간 영상 송수신 장비로 자신의 발을 확인하며 한 걸음씩 어둠을 통과한다.

낮에만 관람하던 전통정원 희원의 ‘보이지 않던 밤’을 몸과 기계의 눈으로 다시 보여준다. 


인도계 영국 작가 자슬린 카우어의 빨간 자동차에는 거대한 흰색 뜨개가 내려앉았다.

‘소시오모빌’은 작가가 “아버지가 처음 소유했던 자동차이자 그가 품었던 이주민으로서의 열망”을 재현했다고 밝힌 작품이다. 

자동차를 덮은 4m 크기의 손뜨개 도일리는 제국주의의 유산과 면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옛 식민지에서 영국 방직공장으로 이어진 이주의 역사를 연결한다.

곁에는 자동으로 연주되는 인도식 하모니움이 놓였다. 카우어가 아버지에게 종교적 노래를 배우며 연주했던 악기다. 가족의 기억을 들추자 제국과 이주의 역사가 따라 나온다. 

전시는 건물 밖으로 계속 번진다.

정원의 소나무 사이에서는 레이첼 윤의 인공 야자수 ‘퍼레이드 파라디 II’(2026)가 홀로 빙글빙글 돈다. 

테마파크의 인공 야자수에서 착안한 작품이다. 진짜 나무들 사이에 가짜 야자수를 심어 자연과 인공,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비튼다.

카페 앞 초록 정원에서는 장난감 나비 두 마리가 피아노를 연주한다. 홍애린의 ‘뮤직 사이렌(듀엣)’(2026)이다. 

비트린 안의 장난감 나비가 모터로 날개를 움직이면 적외선 센서가 그 움직임을 감지한다. 

빛의 진동은 사운드 신호로 바뀌어 피아노 소리를 낸다. 한 마리는 높은 음, 다른 한 마리는 낮은 음을 내며 마치 서로 대화를 나누듯 우연한 화음을 만든다.

그리고 정원 위쪽으로 올라가면 루이즈 부르주아의 검은 거미를 지나 마침내 거대한 하얀 달이 나타난다. 

일본 건축가 야마다 스즈코의 ‘매달린 달’(2026)이다. 지름 8m의 반구형 캐노피가 초록 정원 위에 떠 있다.

묵직한 덩어리는 땅을 딛는 대신 공중에 떠 있다. 얇고 단단한 FRP 표피 자체가 하중을 견디는 ‘모노코크’ 구조를 사용해 무게감과 부유감이라는 상반된 감각을 동시에 만들어낸다.

매끄러운 흰 표면은 햇빛을 받아 달처럼 빛난다. 관람객들은 그 아래 들어가 앉고 쉬며 공간을 점유한다. 시간의 흔적을 품은 옛 정원 위에 낯선 달 하나가 내려앉았다.

호암은 옛것을 밀어내지 않았다. 옛것 한가운데 전혀 다른 주파수를 틀었다.

서로 다른 주파수는 충돌하지만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다. 그 불협화음 자체가 이번 전시의 풍경이다.

고미술을 품어온 44년 된 호암미술관이 새것을 받아들이며 스스로의 경계를 넓혔다. 온고지신은 때로 이렇게 발칙하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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