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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머링맨 세화미술관에 바젤리츠 왔다…1500억 규모 사후 첫 개인전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6-08-13 06:37 | 174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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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은기자=     한국 사람들이 제 작업에 놀라거나 흥미를 느낄지 무척 궁금하네요.”


독일 현대미술의 거장이자 ‘거꾸로 회화’로 잘 알려진 게오르그 바젤리츠(1938~2026)가 한국 관객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다.


20년 만의 한국 개인전을 앞두고 지난 4월 세화미술관이 진행한 영상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작업이 “아시아 문화와는 꽤 거리가 있을 것”이라면서도 “어찌 보면 그래서 멀면 멀수록 더 좋은 법”이라고 말했다.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거리를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는 “여러 난관이 있겠지만 제 말뜻이 온전히 전달되었으면 한다”고도 했다.

이 인터뷰 3주 뒤인 4월30일, 바젤리츠는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여전히 분주하다. 


지난 5월 베니스비엔날레 기간 특별전에서 세계 미술인들을 만난 데 이어, 이제 생전에 준비한 한국 전시로 관객을 맞는다.


해머링맨이 있는 서울 광화문 세화미술관에서 12일 개막한 바젤리츠 전시는 그의 약 60년에 걸친 회화와 드로잉, 조각 46점을 선보인다. 이 가운데 39점은 국내에서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1966년 초기작부터 2026년 신작까지, 세화미술관 소장품 10점을 비롯해 바젤리츠 스튜디오와 타데우스 로팍 등에서 작품을 모았다. 전체 출품작의 보험가액은 약 1500억원이다.

국내 미술관에서 바젤리츠를 집중 조명하는 것은 2007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게오르그 바젤리츠: 러시안 페인팅’ 이후 19년 만이다.

이번 전시는 애초 유작전이 아니었다. 세화미술관은 1년여 전부터 바젤리츠 스튜디오와 작품을 협의했고, 미술관 관계자들이 직접 작가를 찾아 인터뷰까지 촬영했다. 그러나 인터뷰를 마치고 귀국한 지 약 3주 뒤 작가의 별세 소식이 전해졌다.

안미희 세화미술관장은 “살아 계실 때 작품 세계를 보여드리는 전시로 준비했는데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면서 유작전이자 회고전이 됐다”며 “생전 작가 측과 모든 협의를 마친 상태여서 전시는 무리 없이 진행됐다”고 말했다.


바젤리츠는 1969년부터 인물과 풍경을 거꾸로 그리기 시작했다. 흔히 관객에게 그림을 다르게 보게 하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되지만, 정작 그는 이번 인터뷰에서 “제 의도는 꼭 관람객과 접촉하는 데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가 찾고 있었던 것은 당대의 지배적인 미술 흐름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아 자기 자리를 만들 것인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추상미술 역시 그에게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적 경계를 가진 미술이었다.

그는 “현실에 반기를 드는 건 중요한 일이지만 그 반기를 세상에 내보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며 “반기를 드러내려면 말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머릿속의 생각을 실제 형상으로 만들어야 했고, 그 방법 가운데 하나가 이미지를 뒤집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까지 회화를 지배해온 규칙과 관습을 의심했다. 특히 위와 아래, 오른쪽과 왼쪽이라는 방향 자체가 “대단히 자의적”이라고 봤다. 


그림의 방향을 뒤집는 최초의 교란을 통해 익숙한 이미지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당시 자신의 ‘뒤집힌 이미지’가 다른 화가들에게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대부분 그저 장난으로 치부했다”고 말했다.

그의 삶 역시 기존 질서와 순탄하게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본명은 한스 게오르그 브루노 케른. 1938년 독일 작센 지방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제2차 세계대전과 독일의 분단을 경험했다. 


동베를린에서 미술을 공부하다 서베를린으로 옮겼고, 1961년 고향의 이름을 따 게오르그 바젤리츠로 개명했다.

그는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독일, 그리고 독일인이라는 사실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독일 신표현주의를 대표하는 바젤리츠는 20세기 후반 독일 미술의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한 핵심적인 작가로 꼽힌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목격한 그는 전쟁의 상흔과 독일 분단의 역사와 기억을 파편화된 신체와 뒤집힌 형상이라는 독자적인 조형 언어로 풀어냈다.

그의 회화에서 영웅과 독수리 같은 국가적 상징이 온전한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는 것도 이러한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1960년대 ‘영웅’ 연작에서 영웅은 승리자가 아니라 황폐한 풍경에 홀로 남겨진 상처 입은 남성이었다. 


독일을 상징하는 위엄 있는 독수리 역시 날아오르는 대신 거꾸로 추락하듯 화면에 매달린다.

2000년대 들어서는 자신의 과거 작품을 다시 불러내는 ‘리믹스(Remix)’ 연작을 선보였다. 과거 작품을 완성하거나 수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젊은 시절의 이미지와 미술사의 기억을 현재로 다시 소환했다. 


뒤샹과 드 쿠닝, 잭슨 폴록, 키르히너 등 선대 작가들의 모티프 역시 자신의 화면 안에서 새롭게 뒤섞었다. 


손과 발도 평생 반복한 모티프다. 특히 서구에서 이성과 논리를 상징하는 머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발을 화면 위로 끌어올렸다.

땅을 딛고 인간을 지탱하면서도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하는 발. 동독에서 서독으로 이동했지만 끝내 독일인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작가의 삶과도 묘하게 겹쳐진다. 


이번 전시에서 분위기가 가장 크게 바뀌는 곳은 마지막 공간이다.

검은 통로에는 일부러 작품을 걸지 않았다. 빈 공간을 지나 독수리 연작을 거치면 어둠 속에서 황금빛 ‘골드 페인팅’이 떠오른다. 자연스럽게 추모의 공간 같은 숭고함이 감돈다.

3층 전시장 중앙에는 해골을 연상시키는 검은 조각도 놓였다. 아프리카 조각에서 모티프를 얻은 작품으로, 말년에 반복했던 해골 이미지와 늙어가는 육체가 겹쳐진다.

그러나 이를 죽음을 예감한 노년의 작업으로만 읽기는 어렵다. 전시 준비 과정에서 검은 공간의 추모 분위기가 강해지자 바젤리츠 스튜디오 측에서도 “너무 죽음을 상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했다. 


미술관은 무게를 덜어내면서도 생애 마지막 작품을 만나는 공간의 긴장은 남겼다.

바젤리츠는 마지막까지 새로운 재료와 색, 회화의 가능성을 시험했다. 말년에 붙잡은 금색 역시 생의 종착점을 알리는 색이라기보다 기존의 자기 회화에서 다시 한번 벗어나기 위한 선택에 가까웠다.

금색은 처음부터 자연스러운 선택은 아니었다. 그는 영상 인터뷰에서 금색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자신에게도 대담하고 ‘뻔뻔한’ 선택처럼 느껴졌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작업을 거듭하면서 금색이 최근 몇 년간 자신의 회화에서 “사실상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금빛 화면에 그려진 것은 젊고 강한 육체가 아니다. 자신과 평생의 동반자 엘케의 늙은 몸이다. 인물들은 여전히 거꾸로 매달려 있지만 젊은 시절의 육중한 신체는 사라지고 가느다란 선으로 간신히 형체를 유지한다. 화면의 빈 공간도 커졌다.

작가는 생애 마지막 인터뷰에서 “검은색은 미학적 의도의 시작이고, 금색은 그 과정의 끝”이라고 말했다. 


노년에 이른 거장은 역설적으로 가장 화려한 금빛 위에 나이 들어가는 인간의 연약함과 삶의 무게를 담담히 드러냈다.

신체적 한계 앞에서도 작업은 멈추지 않았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그는 손이 닿지 않는 거대한 캔버스를 바닥에 펼쳐놓고 작업을 이어갔다. 


화면에는 물감뿐 아니라 휠체어 바퀴와 보행 보조기의 자국까지 남았다. 늙어가는 몸의 흔적 자체가 회화의 일부가 된 셈이다.


평생 회화의 규칙과 싸웠던 바젤리츠는 말년에 이르러 자신이 사용해온 ‘전략’에서도 멀어졌다.

전시장 영상에서 그는 자신의 예술을 돌아보며 말했다.


젊은 바젤리츠에게 회화가 교란하고 뒤집어야 할 대상이었다면 노년의 바젤리츠에게 회화는 더 이상 전략으로 통제할 대상이 아니었던 셈이다. 


자신이 예술을 움직이는 데서 예술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는 쪽으로 이동했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한 거장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데 머물지 않는다. 60여 년 동안 자신이 만든 회화의 규칙마저 다시 의심해온 화가가 끝내 어디까지 나아갔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그는 한국 관객에게 자신의 작품을 이해해 달라고 하지 않았다. 서로 다른 문화 사이의 거리를 오히려 그대로 받아들였다.
 

제 작업이 아시아 문화와는 꽤 거리가 있을 테니까요. 어찌 보면 그래서 멀면 멀수록 더 좋은 법이죠.”


전시에 대한 관심도 뜨겁다. 슈퍼 얼리버드 티켓은 판매 2분 만에 매진됐고, 1차 얼리버드 티켓도 일주일 만에 모두 소진됐다. 세화미술관 개관 이래 가장 높은 사전 예매율이다.

바젤리츠전을 계기로 미술관 공간도 손봤다. 사무실을 전시장으로 바꾼 2층 공간은 천장을 노출해 층고를 높였고, 굿즈숍은 초록 나무가 내다보이는 창가로 옮겼다. 1층 안내데스크도 정비해 건물 안에서 미술관의 존재감을 높였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세화미술관은 내년 개관 10주년을 앞두고 새로운 방향도 모색한다. 태광그룹 세화예술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세화미술관은 앞으로 미술사적으로 중요하지만 국내에서 충분히 소개되지 않은 작가들의 국제전을 지속적으로 선보일 계획이다.

안미희 관장은 “미술사적으로 중요하고 의미가 있지만 국내에서 많이 보여지지 않은 작가들의 전시를 1년에 한 번 정도는 기획할 것”이라며 “바젤리츠를 시작했으니 이 정도 수준은 가져가야 하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미술관 밖으로 나오면 또 한 명의 바젤리츠가 기다린다.

광화문 빌딩 입구,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해머링맨’ 왼쪽에 검은 인물이 길쭉한 두 다리로 서 있다. 바젤리츠가 젊은 시절의 자신을 되돌아보며 만든 청동 조각 ‘친구(Friend)’다.

1965년 스물일곱 살의 자신을 2024년 여든여섯의 바젤리츠가 다시 불러냈다. 자신의 과거를 다시 그렸던 ‘리믹스’ 연작처럼 노년의 작가가 젊은 자신과 다시 마주한 작품이다. 

낯선 검은 인물 앞에서 오가는 시민들이 걸음을 멈추고 휴대전화를 꺼내 든다. 전시장은 미술관 밖 광화문 거리까지 이어진 셈이다.

전시 기간 연계 프로그램도 열린다. 9월1일에는 바젤리츠의 유족 다니엘 블라우와 미술사학자 윤희경 작가의 작업 세계와 미술사적 의미를 주제로 대담한다. 오디오가이드는 가수 빈지노가 맡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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